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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임] '공감'과 '불편'의 말하기, '동의'와 '비판'의 말하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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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임] '공감'과 '불편'의 말하기, '동의'와 '비판'의 말하기

빨간도란쓰


논쟁 또는 공적 발화의 장에서, 상대방 또는 제3자의 글 또는 주장에 "공감"한다고 표현하는 것. 


맥락에 따라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는 있어도, 지적으로 정직하지 못한 일종의 책임 회피라고 생각한다. '공감'은 타인의 입장이나 감정에 대해서 하는 것이지, 논지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자체는 논증의 구체적 주장 중 어느 것에도 자신의 동의를 보증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게 되면, 논증이 비판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방어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개인적 느낌'일 뿐이므로. 영어로 옮긴 "I sympathize with the argument"라는 표현이 얼마나 어색한지를 떠올려보면 "해당 논지에 공감하나~"와 같은 표현들이 얼마나 모호한지가 명백히 드러난다.


'불편'이라는 표현 역시, 제3자의 주장에 대해 평하는 맥락에선 마찬가지다. 어떤 구체적 행위나 경험에 대한 불편함, 또는 이질감을 토로하는 것은 (특히나 사회적 소수자의 입장에선) 공적 발화의 정당한 시작점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주장에 대해 불편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보다 깊은 논의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리는 사적 정념의 표출에 그치고 만다. 이처럼 '감정 중심의 말하기'는 본인이 느끼는 감정을 청자가 공감해줄 것을 은연중에 요구하면서도, 해당 논증이 비판에 직면했을 때 발화자가 그에 성실하게 답할 의무를 면제시켜준다.


나아가, '공감'과 '불편'의 언어로 공적 발화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기득권의 방증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공론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끊임없이 논증해야 하는 입증부담이 없는 이들은 고작 자신의 정념을 드러냄으로써 손쉽게 문제제기를 기각해버릴 수 있다.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피억압 기층의 공적 문제제기를 견디지 못하고 "저 주장은 나를 불편하게 해"라고 간편하게 일축해버릴 때 배후에 자리한 태만함이다.


생산적인 논의/논쟁은 참여하는 주체들이 논지와 논증의 어느 지점에까지 동의하는지를 밝히고 커밋할 때 가능해진다. 그래야만 주장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다. '공감'과 '불편'의 말하기는 그런 의미에서 지적으로 게으르고 비겁하다. 논지에는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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