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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퀴어함(Queerness)의 비-외설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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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퀴어함(Queerness)의 비-외설성

빨간도란쓰

통속외설-시리즈 


“퀴어란, 본질적으로 지금 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Queerness is essentially about the rejection of a here and now and an insistence on potentiality or concrete possibility for another world.”

- Jose Esteban Munoz, <Cruising Utopia: The Then and There of Queer Futurity>


1. 위 문장은 ‘퀴어’라는 성질을 ‘통속’에 대한 거부로 정의한다. <지금, 여기>를 좇아가지 않음으로써 ‘세속과 통conform’하지 않겠다고, 그것이 바로 ‘퀴어’의 핵심essence이라고 선언한다. 언뜻 읽으면 이 정의만으로 ‘퀴어’의 운명은 정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통속’을 거부할 뿐, 그 거부가 ‘예술’일지 ‘외설’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이 정의를 빌어 ‘퀴어’라는 성질이 ‘예술’일수도 있으나 자칫 ‘외설’로 몰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고 결론짓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주장하건대, 오히려 이 정의만으로도 ‘퀴어’는 ‘통속’과 ‘외설’을 오가는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대변하는 성질이 되기에 충분하다.


3. <지금, 여기>를 거부하는 것은 의식적인 선택이며, 동시에 지성을 요구하는 선택이다. 무언가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거부의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오성의 국면이 열리고 추상화된 존재를 인식하고 난 후에야 그 존재를 부정하는 변증법적 부정의 국면에 돌입할 수 있는 법인데(헤겔), 자기가 거부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그것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4. 대화를 의도했으나 실패해 독백으로 전락해버린 발화는 ‘외설’로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의도된 독백은 분명 예술의 한 형식이다. 같은 맥락에서, 의도된 적대(敵對)는 적개심에 가득차 있을지언정 여전히 일종의 대면(對面)이며 대화(對話)다. 따라서, <지금, 여기>를 거부하는 행위는 대화가 상실된 ‘외설적 독백’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여기>에 탄핵과 추방을 선고하는 메시지를 담은, 적대적이지만 의도적인 대화의 실천인 것이다.


5. 그렇기에 <지금, 여기>의 의식적 거부로 정의되는 ‘퀴어’는, 정확하고 분명한 <지금, 여기>에 대한 인식 아래 실천으로 옮겨지는 한, 절대 ‘외설’일 수 없다. 그 실천의 주체는 자신이 ‘통속’의 입장에 서 있는 자들에게는 외설적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러한 평가는 그릇된 통속적 관점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 자신의 실천은 바로 그 ‘통속’을 전적으로 거부하며 새로운 미학을 창조해나가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균형의 끈을 놓고 통속과 합일되거나 통속을 망각해버릴 때, 자신의 행위에는 잠재적으로 외설성이 깃들 수 있다는 것 또한 모두 파악하고 있다. 올바른 의미에서 자기-의식적self-conscious인 외설은 ‘외설’이 아닌 것이다.


+. 의도된 적대는, 겉으로는 평화적이며 우호적인, 따라서 더 많은 교류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대화보다 훨씬 진짜 “대화”에 가깝다. <지금, 여기>의 미학이 수용하기 쉬운, 듣기 좋고 보기 좋은 메시지들은 통속적 미학에 쉽게 포섭되어 버릴 뿐, 진정한 균열을 내지 못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삭제된 목소리들은 이런 평화적 대화라는 기만적 방편을 선택할 수 없다. 오직 적대만이 <지금, 여기>의 모순과 갈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으며, <지금, 여기>에 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거부와 적대의 형식으로 요청되는 대화(이를테면, 위에서 정의된 ‘퀴어’)는 여타 대화들보다 더 발본적radical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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